소망이 자면서 듣기 좋은 성경이야기

성지를 둘러싼 천년 — 십자군에서 가자까지

스가랴 8장, 마태복음 5장, 로마서 12장 · 성경으로 읽는 세계사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9

이야기 요약

성지를 둘러싼 천년 — 십자군에서 가자까지

잠깐,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봅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텐트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한 노인과 두 여인, 그리고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한 아버지의 집에서 태어나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 후손들을 따라갔습니다. 이스마엘의 열두 지파, 에서와 이스마엘 집안의 결합, 아말렉, 미디안, 기드온의 삼백 명. 한 집안에서 나온 씨앗들이 어떻게 서로의 적이 되었는지를 보았죠.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두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을 걸었습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 바벨론 포로와 고레스 왕의 해방령,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1096년부터 지금까지, 약 천 년. 아브라함의 텐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십자군의 칼을 거쳐, 오스만의 성벽을 지나, 1948년 유엔의 결의문 위에, 그리고 오늘날 가자의 잿더미 위에 이르렀습니다. 이 긴 여정의 끝에서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성지를 둘러싼 천년 — 십자군에서 가자까지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성지가 이교도의 손에 있다. 예루살렘을 되찾아라. 십자가를 들고 나서는 자는 모든 죄를 사함받을 것이다.' 그 말은 유럽 전역에 불을 질렀습니다. 기사도 귀족도, 평민도 수도사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외침을 들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겁니다. 1099년 7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대학살이었습니다. 도시 안에 있던 무슬림과 유대인, 심지어 동방 기독교인들까지 칼로 베었습니다. 목격자들의 기록에는 거리에 피가 흘렀다고 적혀 있습니다. 무릎까지 차는 피라고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26장에서 검을 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그 말씀 앞에서, 십자군의 칼날은 무엇이었을까요. 대다수의 신학자와 역사가들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십자군은 복음의 이름을 빌렸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타락한 종교 권력과 정치적 야망,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전쟁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복음과는 반대 방향을 향한 폭력이었습니다.

성지를 둘러싼 천년 — 십자군에서 가자까지

십자군 전쟁은 약 200년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살라딘의 손에, 이슬람 세계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250년이 지난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습니다. 술탄 셀림 1세가 이집트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동 전역을 장악한 겁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무려 400년을 보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만 지배 하의 예루살렘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는 점입니다. 16세기 술레이만 대제는 예루살렘 성벽을 새로 쌓았습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찍는 그 황금빛 돌성벽이, 사실 오스만 시대의 유산입니다.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이 각자의 구역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공존했습니다. 완전한 평화는 아니었지만, 칼로 서로를 베던 십자군 시대보다는 나았습니다. 400년의 오스만 시대가 끝난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1917년, 영국군 장군 알렌비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바로 그 해,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는 한 통의 편지를 씁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수립에 호의적입니다.' 밸푸어 선언이었습니다. 그 짧은 편지 한 장이 20세기 중동의 지도를 바꿔놓게 됩니다.

성지를 둘러싼 천년 — 십자군에서 가자까지

1948년 5월 14일 금요일 오후 4시, 텔아비브의 한 박물관에서 다비드 벤구리온이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포한다.' 박수 소리가 터졌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나라 없이 흩어져 살았던 약 1900년의 세월,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기억. 그 모든 것 끝에 마침내 나라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선언이 끝나고 11분 뒤, 미국이 국가를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다섯 아랍 국가가 동시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다음 날,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이 역사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 환상의 성취가 아니냐고.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모인 것이 성경 예언의 실현이 아니냐고. 그런데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단순한 등치는 조심스럽습니다. 에스겔의 뼈 환상은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땅의 회복만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을 함께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곧 성경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직 흐르고 있습니다.

성지를 둘러싼 천년 — 십자군에서 가자까지

그로부터 76년이 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국가가 되었습니다.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는, 1948년 이후 집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자지구에는 230만 명이 갇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좁은 땅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약 1200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자를 전면 공격했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집이 무너졌습니다. 병원이 무너졌습니다. 어린이들이 죽었습니다. 이 전쟁을 보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혼란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니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명백한 죄악이다'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두 목소리 다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지만, 어느 쪽도 성경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이란이 있습니다. 핵 개발을 멈추지 않고,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말을 국가 정책처럼 표명합니다. 4000년 전 아브라함의 텐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제는 핵전쟁의 그림자 앞까지 와 있습니다.

성지를 둘러싼 천년 — 십자군에서 가자까지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스가랴 8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길에 노인과 노파가 다시 앉으며, 그 성읍 길에는 남녀 아이들이 뛰놀리라.'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바라시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아이들의 웃음소리입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직접 던져집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누구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바울은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평화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알면서도 화목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이스라엘 편도, 팔레스타인 편도, 이란 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화평을 만드는 자, 중보기도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을 구하고, 인도적 지원으로 고통받는 생명들 곁에 서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어떤 논리에도 동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화해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성지를 둘러싼 천년 — 십자군에서 가자까지

4000년. 우리는 오늘 그 긴 강줄기의 끝에 서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텐트에서 사라가 손에 쥔 것은 조급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전에, 내가 먼저 만들어야겠다.' 그 한 번의 선택이 이스마엘을 낳았고, 두 민족을 갈라놓았고, 수천 년의 얽힘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너무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인내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합니다. 십자군 기사들도, 밸푸어 선언에 서명한 외교관도, 1948년의 정치인들도, 오늘 가자에 미사일을 쏘는 사람들도. 각자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의 성취 시기는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이 앞서서 행하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선의에서 나왔더라도, 또 다른 상처를 낳습니다. 요셉을 기억하십니까. 구덩이에 던져지고, 종으로 팔리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드온을 기억하십니까. 삼백 명으로 수십만 대군을 무너뜨렸을 때, 그것은 기드온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였습니다. 하갈이 광야에서 울 때,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이스마엘의 이름이 증언하듯,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천 년의 갈등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끝이 무엇인지. 하지만 성경이 4000년을 통해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위에 계십니다. 인간의 조급함이 빚어낸 상처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십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은 어떤 민족도, 어떤 국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묵상

4000년의 이야기를 따라오면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이 기다리지 못했을 때,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야곱이 스스로 장자권을 빼앗으려 했을 때, 20년의 광야가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군 기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칼을 들었을 때, 피로 물든 거리가 생겼습니다. 1917년 외교관들이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종이 한 장으로 결정했을 때, 76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인간의 시간표는 다릅니다. 이것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입니다. 사라가 틀렸던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조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움직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려 합니다. 그 선의가 때로 다른 상처를 낳습니다. 스가랴 8장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남은 백성의 눈에 기이하게 보이겠거니와 나의 눈에도 어찌 기이하겠느냐.'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노인과 아이들이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것도, 4000년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다만 그 시간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름은 그 시간표를 앞당기려는 조급함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로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기도로, 긍휼로, 폭력에 동조하지 않는 용기로.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천 년의 역사를 걸었습니다. 십자군의 칼날도, 오스만의 성벽도, 1948년의 환호도, 오늘의 가자도. 그 모든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저희가 이 갈등을 볼 때 어느 편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기도가 먼저이고, 행동이 따르게 하소서. 오늘 예루살렘에서, 가자에서, 테헤란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들을, 두려움에 떠는 어린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세요. 4000년을 걸어오신 하나님, 당신의 시간표 안에서 화해를 이루어주소서. 저희는 기다리겠습니다. 조급함 대신 기도를, 판단 대신 긍휼을, 침묵 대신 화평의 중보를 선택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으로 읽는 세계사의 다른 에피소드